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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의 아이디어와 장영실의 기술로 제작된 측우기

측우기는 1441년(세종 23년)에 당시 세자였던 문종의 아이디어와 장영실의 기술로 처음 제작되었다. 그 이전에는 땅에 스며든 빗물의 양을 쟀는데, 그러다 보니 땅의 상태에 따라 측정치가 달라져 정확한 강우량을 알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새롭게 제작된 측우기는 주철이나 청동으로 용기를 만들고, 거기에 빗물이 고이면 눈금이 새겨진 주척이라는 자로 비의 양을 재기 때문에 정확한 강우량을 측정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자연현상을 객관적인 수치로 나타내려고 했다는 데 측우기의 과학성이 있다. 세종은 이렇게 동일하게 제작된 측우기를 각 지방 관아에 보내 측정 결과를 보고하게 했다. 그 결과 각 지방의 우량을 보고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졌다. 



현존하는 실제 측우기는 3단 분리형 구조이다. 전체를 조립했을 때, 전체의 깊이는 31.4㎝로, 상단 10.6㎝, 중단 10.5㎝, 하단 10.3㎝의 깊이로 되어 있다. 안지름은 14㎝, 바깥지름은 15㎝ 정도이다. 그러면 왜 하필 3단으로 나누었을까? 우선, 각 단의 경계가 자의 눈금 역할을 하게 되어 주척을 쓰지 않아도 측우기 안의 물의 양을 대강 가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측정의 편리성을 들 수 있다. 3단으로 나눔으로써 강우량이 1단, 또는 2단의 용기를 넘지 않을 경우, 원통을 분리하면 주척으로 강우량을 재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정조는 측우기의 수심을 보고할 때는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각에 측정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측정된 자료는 정확한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특히 1770년부터 1907년까지의 서울 지역의 강우 기록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강우량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연중 측정된 강우량 중 홍수기의 관측 자료는『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홍수 피해 내용과도 일치하고 있다. 이렇게 측우기에 의한 강우량 측정은 현대적 기상 장비가 도입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측우기에 의하여 측정된 강우량은 단순히 기록으로만 남겨진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이용되기 위해서 관측된 것이다.『정조실록』23년(1799년) 5월 22일에는, 정조가 8년간의 강우량 통계치를 비교하면서 금년도의 강우량과 비교하여 농사 걱정을 하는 기록이 있다. 특히 호서 지방과 영남 지방의 지역별 강우량까지 비교하고 있다. 이처럼 정조는 과거의 연 강우량 통계치를 가지고 가뭄의 심한 정도를 판단하였으며, 월별․지역별로 예전의 자료와 비교하여 농사에 이용했다. 이러한 비교 방법은 과거 통계치를 이용하여 현재의 상황과 지역적 분석을 하는 현대적인 강우 측정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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